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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크랩] Enemy 리뷰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당혹감을 느꼈다(이라 쓰고 욕이 나왔다라고 읽는다)면 다음의 일독을 권한다.



1. 일단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을 독자로 가정하고 리뷰를 쓴다.


원래는 스포일러 없는 리뷰만을 썼으나 이 영화는 예외로 취급함이 옳다. 왜냐하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으므로(!),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밝히는 것이 의미있는 작업이 될 듯하기 때문이다. 즉, 이 리뷰는 '스포일러 있음'이 아니라 스포일러 그 자체이고 그 스포일러가 대체 무슨 뜻인지 밝히는 글이다.




2. 이 한 점의 추상화 같은 영화가 무슨 뜻인지 고민해보기 전에 감독에 대해 살짝 살펴보자.


드니 빌뇌브 (Denis Villeneuve). 캐나다 퀘벡 출신 감독이다. 그래서 이름이 데니스가 아니라 드니. 언어만 불어를 쓸 뿐인데 영화도 상당히 프랑스스럽다(라고 쓰고 이해하기 어렵고 재미없다라고 읽는다). 역시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인가보다. 그러고보니 외모도 상당히 불란서스럽다. 키크고 얼굴길고 이마부터 숱이 줄고 있으며 턱수염으로 시선을 분산하 아쉽게도 보지는 못했으나 전작인 "프리즈너스"가 호평을 받아 이번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다. 전작은 누가 범인인지 추궁하는 스릴러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독창성을 발휘한 듯 한데, 이번 영화는 다소 형식 파적인 모습을 보인다.



3. 본격적인 영화 분석(혹은 내용 때려 맞추기)에 앞서 몇가지 고백하자면.


자막이 올라가자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왜냐하면 옆에 앉은 아리따운 숙녀분(이자 혼자는 극장을 못가는 나를 위해 함께 자리해준 여친)에게 영화에 대해 설명해 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특기인 영화 내용 물고 늘어지기를 할 수 없는 영화였다. 지금도 자신은 없지만, 원래 예술은 감상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 보일 수 있는 것 아닌가! (내 맷대로 대충 분석해보자!)




4. 우선 포스터를 보자.


감독의 의도는 포스터에 축약되기 마련이다. 주인공의 머리 위로 마천루들과 그들의 높이만큼 거대한 거미가 한 마리 보인다. 이것들이 배치된 자리는 주인공의 뇌의 위치와 일치하는 바, 주인공의 뇌속(머릿속, 뇌리)에 마천루들과 거대거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천루와 거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이 이 영화를 주제가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자는 일상, 후자는 일탈 혹은 금기를 의미한다.



5. 즉, 이 영화는 일상에 지친 한 남자의 망상을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


그 망상은 주인공 아담이, 한밤에 꾸는 꿈일수도 있고, 한낮에 카페에 앉아 공상하는 것일수도 있고, 아직 발현되지 않은 뇌 속 깊은 곳의 잠재의식을 감독이 시각화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역시 꿈일 것이다.


예상컨대, 아담이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동료 교수에게 영화를 추천받고 그 영화를 빌려 귀가해, 집에서 리포트를 채점하다가 그 영화를 보고 잠이 드는 장면까지가 아담의 현실이다. 그 이후 장면부터는 아담의 꿈인 것이다.




6. 이 영화가 아담의 꿈인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아담이 피곤한 듯이 눈을 비비는 장면이 초반에 많이 나오고, 영화 중간중간 (마치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을 때처럼) 화면 전체가 암전 되고 다시 밝아지는 장면들이 셔터를 여닫는 효과를 통해 보여지는 등 지금 주인공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상당히 발견된다.


또한 꿈 부분부터(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어 본 꿈과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꿈은 자신이 평상시에는 할 수 없는 금기의 내용을 담고 있고, 잠재의식을 발현하되 그대로 발현하기 보다는 비틀어 발현하고, 논리정연하기 보다는 뒤죽박죽이고 파편화 되기 마련인데 이 영화의 대부분이 그러하다.




 

7. 현실이 변형된 꿈의 설정들도 매우 노골적이다.


우선 내성적이고 소심한 오래된 세단을 운전하는 아담은,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고성능 바이크를 타는 앤소니로 변형되어 꿈 속에 등장한다. 둘의 외모는 몸에난 상처까지 닮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동일성을 보이지만 성격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영화 도입부에 어머니가 아담의 자동응답기에 남긴 메세지는, 영화 마지막에 앤서니의 어머니가 전화왔었다고 전해달라는 메세지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또, 아담이 싫어하는 블루베리는 앤서니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변형되어 등장한다.


아담의 여자친구와 앤소니의 애인 헬렌 또한 닮은 점이 많은데, 둘 다 금발(매우 밝은색)의 미녀이고, 소매없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다른 점은 헬렌은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디테일들이 바로 꿈이 그 내용을 구체화 할 때 자주 이용하는 현실의 변형 수법이다. 우리가 꾸는 꿈들을 생각해보면, 그토록 원하던 운동경기에서 우승하는 꿈을 꾸면서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는 시상자의 얼굴이 뜬금없이 윗집 할아버지인 꿈을 꾼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런 변형이 이 영화에서 일어난 것이다.




8. 이 꿈의 핵심은 일상의 탈출이자 금기의 파괴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미스테리한 복도의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간 비밀 클럽의 짧은 장면들이 아담의 잠재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앤소니는 멤버쉽으로 출입이 가능한 클럽에 가서 벌거벗은 여체를 탐닉한다. 앤소니가 아담의 잠재의식임을 생각할 때, 아담의 욕망을 앤소니가 표현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의 마음 속 깊은 복도를 지나면 금기시 되는 욕망의 홀이 등장하고 그 홀 안에서 욕망들은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이 춤을 추고 있는 스테이지 앞에 앉은 앤소니는 얼굴은 손으로 가리고 손가락 사이는 활짝벌려 스테이지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얼굴을 가린 손은 금기, 현실, 욕망의 억제를 나타내고, 넓게 벌린 손가락은 본능, 욕망, 금기의 파괴, 일탈을 의미한다.


그 나신의 여체들 중 하나가 거미를 밟는다. 이는 아담의 욕망의 투영체인 나신의 여체가 금기의 표상인 거미를 죽이는 장면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꿈, 이 영화의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일상의 탈출, 금기의 파괴를 담고 있다. 

 



9. 아담은 낯선 임신한 여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욕망한다. 


영화 초반의 비밀 클럽에서는 임신한 나신의 여체가 등장한다. 비밀 클럽은 욕망이 실현되는 공간이고 스테이지에 등장한 여체들은 모두 욕망의 투영체라는 점은 전술한 바와 같다. 또한 영화 종반에는 임신한 여자와 마침내 잠자리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 그 임신한 여자는 거대한 거미로 나타난다. 임신한 여자가 아담의 잠재의식 속의 금기 그 자체였음을 보여주는, 다소 충격적인(!) 라스트 씬이다.


아담의 욕망의 종착지인 임신한 여자와의 육체적관계는 단순한 성적 환상일 수도 있고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 만약 후자라면 그것은 가족끼리의 성관계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꼭 그렇게 고정된 것이라기 보다는 매우 강한 금기 그 자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라스트 씬의 사람보다 거대한 거미가 주는 당혹감, 이질감, 두려움을 그대로 느끼게 될 강한 금기 그 자체 말이다.




10. 얌전한 아담이 왜 그런 욕망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그 자체로 답을 담고 있다. 소심한 성격과 안정적인 직장, 한결같은 여자친구 등 뻔한 일상에 지쳤기 때문에 그런 욕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리포트 채점보다 후순위로 밀린 여자친구와의 잠자리에서 알 수 있듯 권태로운 연애로 인해, 아담은 여자친구와 미지의 남자와의 애정행각을 상상한다.





11. 그러나 아담은 일탈의 설정에도 조심성이 묻어난다.


아담의 잠재의식은 완전한 일탈, 완전한 금기의 파괴를 원하지 않았고 조심스러운 그의 평소 성격처럼 어느 정도의 윤리적인 안전망을 설치하려 한다. 따라서 여자친구의 외도의 대상은 전혀 미지의 남자가 아닌 자신의 잠재의식이자 분신인 앤소니로 설정한다.


그나마도 그 외도가 하룻밤도 무사히 못보낼 정도로 찰나에 머무르길 바랐기에, 여자친구가 앤소니와의 관계 도중 앤소니의 반지 자국을 발견해 내도록 아담의 꿈속에서 설정된다. 그리고 그 찰나의 외도도 견디기 힘든 아담은 여자친구와 앤소니를 심각한 차사고를 당하게 하여 복수한다.




12. 여자친구와 앤소니의 관계로 인해 아담은 욕망의 종착지에 다다른다.


여자친구와 앤소니의 육체적 관계가 있었기에 아담은 헬렌과 잠자리를 가질 명분을 얻게 된다. 아마도 여자친구의 외도를 진심으로 바랐다기 보다는 이 명분을 얻기 위한 장치를 설정한 것이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앤소니의 존재의 의의 자체가, 이 영화의 종착지인 아담의 주된 잠재 욕망인 낯선 임신한 여자와의 잠자리를 달성하기 위함일수도 있다.


어쨌든 잠재의식에서 조차 즉각적인 일탈을 행하지 않고 일탈의 명분을 마련하려는 설정이 역시 아담의 평소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스토리 전개가 마치 아담이 시나리오를 쓴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다시한번 이 영화가 아담의 꿈 속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3. 동료 교수가 추천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제목의 영화를 살펴보자.


영어로는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이다. will은 뜻, 의도, 소망을 way는 길, 방법을 의미한다. 교수라는 직업은 상당히 방대한 공부량을 필요로 하고 그들은 뇌 근력이 상당한 사람들이다. 또한 사회의 존경을 받음과 동시에 상당한 윤리의 준수가 요구된다. 그런 직업을 가진 아담에게 욕망(will)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way)은 바로 꿈인 것이다.



14.그 외에도 여러 장면들에서 이 영화의 주제와 관련한 상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언제나 부옇게 흐린 하늘은 아담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의 모호함을 상징하고, 앤소니가 살던 아파트 근처의 꼬여있는 모양의 쌍둥이 건물은 아담과 앤소니 모습을 은유한다. 닮아있지만(identical) 변형되어(twisted) 있는 모습이다.


비밀클럽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금기로의 접근 가능성을 의미한다. 새로 받은 열쇠는, 과거의 금기인 임신한 여자의 나신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금기인 그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까지 가능하게 됨을 은유한다.


또한 과거의 열쇠는 아담의 잠재의식인 앤소니가 소유했지만, 이제는 아담이 그 열쇠를 소유함으로써 아담이 본인의 욕망에 대해 좀 더 직접적으로 접근가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헬렌과의 육체적관계가 일어난 시점과 새로운 열쇠를 아담이 갖게된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더욱 타당성을 얻는다.


아담이 입고 있는 옷과 앤소니가 입고 있는 옷은 각각의 주체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앤소니가 아담의 옷을 입고 나가면서, 둘의 주체성은 흔들리고 전복되고 교차된다. 아담은 앤소니 집에서 본인이 입고간 옷을 곱게 개어놓고 앤소니의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는다. 일상을 접어두고 일탈을 접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15. 다시 한번 포스터를 보자.


그런데 가죽점퍼를 보니 포스터의 인물은 아담이 아닌 앤소니 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의 포스터에 대한 분석은 오류가 아닌가. 일상(마천루)과 금기(거미)에 사로잡힌 것은 아담이니 말이다. 하지만 너무 팍팍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담은 곧 앤소니이고, 앤소니가 곧 아담이다.


더불어 아담은 앤소니의 옷을 입고 싶어하는 자이므로 포스터에서 앤소니의 옷을 입은 것으로 형상화 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즉, 욕망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왠지 옷은 앤소니인데 표정은 아담 같지 않은가.




16. 제목이 왜 Enemy일까?


또 다른 포스터인 위의 노란 포스터를 보면 거울 이미지를 이용해 나와 적을 형상화 했다. 일상의 적은 일탈, 금기의 적은 욕망. 나의 적은 잠재의식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적은 바로 앤소니인 것이다.



17. 맺음말


이 영화는, 철학적인 질문을 파격적이라 볼 수 있는 형식을 통해 특유의 연출력으로 긴장감있게 전달했기에 예술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 방법이 상당히 불친절하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곱씹을만한 영화를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위에 적은 것은 나만의 해석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님은 당연하다. 가능하면 다양한 해석들을 듣고 싶다. 특히 임신한 여자와의 육체적 관계의 의미에 대해.